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삶의 뜨락에서] 감투와 모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좀 못난 사람이라도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주위에서 보좌를 잘해주면 큰일을 할 수도 있고 남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업적을 이루어 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지 자리가 사람에게 맞지 않으면 당사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우리는 지위를 감투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감투를 쓴다고 합니다. 감투가 머리보다 아주 작으면 맞지 않는 감투를 쓴 머리가 아플 것이고 감투가 너무 크면 머리를 전부 가려서 앞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단종이 임금이 되었을 때 그는 어린애였습니다. 정치는 물론 처신을 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전국옥쇄를 가지고 호두를 까먹었다고 하니 나이 많은 삼촌 수양대군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은 단종의 지위를 빼앗고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강화도에서 소를 치던 소년으로 있다가 왕이 된 철종은 나라를 어찌 다스릴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왕을 제쳐놓고 당파 싸움에 정신이 없었고 나라는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인가 해양부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여자가 해양부 장관이 되었고 그는 국회로 불려 나가 호된 망신만 당하고 얼마 있다 물러났습니다. 대통령 선거 때만 되면 대통령이 무식하다느니 교육과 경제를 모른다느니 하는 말들을 합니다. 물론 대통령이 모두 잘 알면 좋겠지요. 그러나 누가 국방, 경제, 교육, 사회, 사법을 모두 알겠습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대통령을 계획했던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도 모든 부분을 알지 못했고 어떤 대통령은 교육부 장관을 잘못 뽑았다고, 어떤 대통령은 경제 부총리를 잘못 뽑았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은 권력 투쟁을 했다고 비난을 받지만, 정치를 잘못했다고 비난을 별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많은 전문가와 많은 인재를 뽑은 것이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인사가 만사라고 했지만, 그의 인사는 그의 말처럼 잘 안 되어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나라의 일만이 아닙니다. 어떤 기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기관이나 최고의 자리에 앉으면 많은 아첨하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리고 Richard Stingel 의 말처럼 아첨하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 몸에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아첨하는 소리 때문에 그 소리에 맞는 인사를 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기가 힘이 들고 그 역량을 발휘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오래전에 제가 근무하던 대학병원에 밑의 사람에게는 가혹하고 오만하며 부정을 하던 과장이 병원장이 출근하는 길목에 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하며 아첨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일 처럼 원장이 출근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장은 그의 아첨이 기분이 좋았던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그를 두둔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원장이 자기가 속은 것을 알았지만….     모자를 쓰는 여자, 남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들은 모자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고 멋이 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여자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들도 험프리 보카드처럼 모자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안소니 퀸처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투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제갈량처럼 승상에 어울리는 사람도 있고 유선처럼 제왕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이용해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감투 모자 김영삼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대통령 선거

2022-12-05

[삶의 뜨락에서] 냉혈한

한 은행과장이 있는데 이 사람은 아주 사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은행 업무의 일점 착오도 허락하지 않는 사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완전무결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라서 일상생활에서 웃는 일이 없었고 항상 싸늘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이 그의 옆에만 가도 감기에 걸린다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날 은행 직원이 업무 중에 쓰러져 병원에 데려갔는데 의사가 수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피검사를 하니 이 은행 간부 밖에 맞는 피가 없었습니다. 냉정한 은행가는 싫다고 버텼으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은행 직원들의 강권 때문에 채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혈했는데 환자가 사망했습니다. 환자의 가족은 항의하고 병원에서 조사했는데 아무런 착오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본 결과 은행원의 피가 너무 차가워서 피가 들어가면서 환자가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살면서 차가운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항상 표정은 냉랭하고 얼굴에 웃음을 보이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 C라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아주 훌륭한 의사였는데 그 교수님이 웃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는 냉랭한 분이었습니다. 그 교수님 밑에서 교육받은 전공의들은 교수님의 웃는 얼굴을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다는 교수님입니다. 전공의가 아침에 늦으면 “그렇게 출근하기가 힘들면 집에서 쉬어”라고 한마디 하고는 돌아서서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환자가 교수님의 지시를 어기는 일이 있으면 “그렇게 말을 안 들으려면 병원에는 왜 와, 한약방에나 가보지”하고는 일어서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학생들이나 전공의는 교수님 옆에만 가면 한기가 느껴지고 감기에 걸린다고도 하고 실수가 있을까 전전긍긍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졸업 사은회 때 그 교수님을 초대하고 사은품으로 그때 상영 중이던 토니 커티스와 메릴린 먼로가 출연하는 ‘뜨거운 것이 좋아’라는 입장권을 사드린 일이 있습니다. 물론 교수님 중에는 무서운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섭게 야단을 치시고는 좀 있다가 웃어주시는 교수님들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야단을 맞아도 이런 온기가 있는 교수님이 좋았습니다.     몇 년 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다수당의 대통령이 3분의 2의 표가 필요한 탄핵투표에서 패배했을까요. 물론 좌파들의 선동과 음모 때문이지만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는 법적으로 잘못이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의 옳은 것과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니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몸을 던지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말입니다. 한참 광화문에서 데모할 때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홀로 그 불길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을 보호하던 장세동 같은 인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몸속에서 따뜻한 체온이 풍겨야 하고 얼굴에 미소가 묻어나야 하고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따뜻한 웃음과 온기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장님을 고칠 때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서 소경에 눈에 바르고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장난기가 있는 분입니까.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울기도 하셨고 세금을 내라고 하니까 베드로에게 낚시하여 처음 잡은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갖다가 세금으로 내라고 하시는 그 유머 있는 분입니다. 곧은 것과 차가운 것은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이용해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냉혈한 은행 직원들 전두환 대통령 은행 업무

2022-09-27

1981년 LA한인타운 첫 방문…85년 방문 땐 한인 식당 찾기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1981년 1월 LA를 방문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외국 정상 가운데 첫 번째 국빈 자격 초청이라 관심을 끌었다.       당시 LA 총영사관의 박민수 총영사와 전 공관원들이 전 대통령의 LA 방문을 앞두고 ‘대통령 초청 교민 간담회’를 비롯한 여러 행사 준비를 위해 여념이 없었다.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가 대통령 방미 선발대로 와서 대통령이 묵을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 미리 왔다. 당시 박 총영사와 이민휘 LA한인회장을 포함해 40여 한인 단체 대표로 구성된 ‘전 대통령 내외 범교포환영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LA에 한국 대통령이 온 것은 18년 만이었다. 한인들은 버스 20대를 대절해 2500여명이 LA국제공항 환영 행사에 나갔다. 역대 대통령 환영 행사 중 최다 인파다.     전 대통령이 숙소로 가기 전 코스인 한인타운 중심인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 노먼디와 웨스턴 구간에 태극기 180쌍이 꽂혔고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렸다. 거리에 2만여 한인이 참석했고 반대 시위자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때 기증한 우정의 종도 전두환 대통령이 첫 타종했다.       전 대통령은 4년 뒤인 1985년 4월 24일 LA를 다시 방문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가던 길에 LA에 들른 전 대통령은 25일 새벽 8가 할매집 식당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민주인사들은 시위를 통해 전 대통령의 무력 정권찬탈과 광주학살 등을 격렬히 항의했다. 원용석 기자방문 la한인타운 la 방문 이민휘 la한인회장 전두환 대통령

2021-11-22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